권리로 본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 ①
디지털 앞에서도 당당할 권리
요즘 곳곳에서 들립니다.
“디지털 약자 지원”, “어르신 전용 창구”, “고령층 디지털 교육”.
표현만 보면 배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마음에 남는 건 이런 문장일지 모릅니다.
“나는 뒤처진 사람인가.” “또 물어보면 민폐 아닐까.”
키오스크 앞에 서면 화면은 복잡하고, 뒤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은행 앱을 깔았더니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몰라 송금을 포기합니다.
관공서에 갔더니 “그건 온라인으로 신청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돌아옵니다.
그 순간, 습관처럼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이 글은 바로 그 말에서 멈추려 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우리는 사과할 자리에 선 사람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용자입니다.
1. “디지털 약자”라는 말이 잘못 돌리는 시선
디지털이 어렵게 느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글씨, 빽빽한 메뉴, 계속 바뀌는 화면, 끝도 없이 요구되는 인증, 영어와 약어 투성이의 안내 문구.
젊은 사람에게도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놓고,
“어르신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라는 말로 넘기는 건 정직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 말은 문제의 방향을 이렇게 잘못 돌립니다.
-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기업과 기관보다,
- 다른 방법을 닫아버린 정책보다,
- 안내와 설명을 줄인 시스템보다,
먼저 “못 따라오는 개인”이 잘못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실제 책임의 순서는 분명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대면·전화·서면 같은 대체 수단을 남겨두고,
충분히 설명할 책임은 서비스를 만드는 쪽에 먼저 있습니다.
그래서 전제를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도 디지털 세상의 사용자다.
설명을 요구할 수 있고, 이해되지 않으면 멈출 수 있고,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 인식을 회복하는 것이, ‘디지털 약자’라는 말보다 먼저입니다.
2. 나이 들어가는 세대의 디지털 권리, 다섯 가지 기준
생활 속에서 “이 정도는 당연히 요구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거창한 문서가 아니라, 오늘부터 마음에 두어도 좋은 최소선입니다.
첫째, 알 권리
내 이름, 내 돈, 내 건강 정보가 걸려 있는 서비스는
무엇을 하는지, 얼마가 드는지, 어떻게 해지하는지 이해한 뒤에 동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냥 누르시면 됩니다”라는 말로 대신될 수 없습니다.
둘째, 설명을 요구할 권리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은행, 통신사, 관공서, 병원 어디에서든
“중요한 내용이니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용자의 자리입니다.
셋째, 선택하고 거절할 권리
디지털 방식이 편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에게 강요될 수는 없습니다.
“앱으로만 가능합니다”라는 말 앞에서 “대면이나 전화로 처리하는 방법도 안내해 주십시오.”
“지금 가입하셔야 편해요”라는 권유 앞에서 “오늘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불안하면 멈추는 것은 까다로움이 아니라 정당한 선택입니다.
넷째, 안전하게 도움 받을 권리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도 됩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도움은 투명해야 합니다.
- 비밀번호와 인증번호는 직접 입력하게 해 줄 것
- 무슨 설정을 하는지 화면을 함께 보며 설명할 것
- 공공기관·공식 창구·검증된 교육을 통해 이뤄질 것
“그냥 맡기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에
“제가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답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섯째, 내 정보와 내 돈을 지킬 권리
수상한 문자, 링크, 전화, 계좌 변경 요청 앞에서 멈추고,
공식 번호로 다시 확인하고, 잘못된 결제에 취소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나의 이름과 재산에 어울리는 태도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우리는, 디지털 앞에서 작아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
3. 오늘, 스스로를 위해 해볼 수 있는 다섯 가지
권리는 선언만으로는 약합니다. 생활 속 한 번의 행동이 있을 때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과하지 않은, 그러나 분명한 다섯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 이해되지 않으면 서명·동의를 미루기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해 보세요.
“중요한 내용이라 그런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오늘은 결정을 미루고, 내용을 더 보고 싶습니다.”
멈추는 것은 예의 없음이 아니라 책임 있는 결정입니다. - ‘공식 도움 창구’ 한 곳 정해 두기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기 위해, 나만의 기준점을 만듭니다.
동주민센터, 도서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디지털 교육이나
은행·통신사의 공식 상담 번호를 기준으로 삼으세요.
“막히면 여기부터 간다”는 출발점 하나만 있어도 위험이 줄어듭니다. - 가족과 세 가지 원칙을 약속하기
가족이 도와줄 때일수록 원칙이 필요합니다.
비밀번호는 본인이 직접 입력하고,
자동이체·정기결제 전에는 금액·기간·해지 방법을 함께 확인하며,
이해되지 않는 서비스는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하면 그대로 존중하기. - 의심될 때 멈추고, 다른 경로로 확인하기
문자나 메신저의 링크를 누르기 전, 직접 대표번호로 전화해 확인하기.
마음에 걸리면 가까운 창구로 가서 “이 안내가 맞는지” 물어보기.
번거로워 보여도 그 한 번의 확인이 큰 피해를 막습니다. - 키오스크·앱 앞에서 말 하나 바꾸기
“나이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대신
“처음이라 그런데, 제가 직접 할 수 있게 한 번만 같이 봐 주시겠어요?”
“이건 잘 이해가 안 돼서, 오늘은 창구로 하겠습니다.”
사과하는 ‘문제 손님’이 아니라 기준을 가진 사용자로 서는 문장입니다.
4. 함께 요구해야 할 세 가지 방향
개인의 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사회에 분명히 요구해야 할 세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1) 필수 서비스에 다른 길을 남겨 둘 것
금융, 행정, 의료, 교통처럼 삶에 직접 연결된 서비스는
“앱으로만 하라”는 방식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대면 창구와 전화 상담을 유지하고,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안내를 공식화해야 합니다.
이는 편의를 구걸하는 게 아니라, 기본 접근권을 지켜 달라는 요구입니다.
2) 읽히는 화면, 이해되는 절차를 만들 것
기관과 기업은 글씨를 키우고 단계를 줄이며,
중요한 결제와 가입 앞에서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어르신들이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계가 복잡해서 피해가 난다”는 사실을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3) 믿을 만한 디지털 지원을 제도화할 것
지자체와 공공·민간이 운영하는 디지털 교육은
광고나 판매가 아니라, 기본 사용법과 안전 수칙 중심으로,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지키며 누구나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령자가 안심하고 물어볼 수 있는 공식 도움 창구를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창구를 없애기 전에, 이해할 수 있는 안내와 다른 선택지를 먼저 마련해 주십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책임에 대한 정당한 요구입니다.
5. 이 편이 남기고 싶은 한 줄
이 글은 “더 열심히 배우라”는 시험지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부족함을 따지는 목록도 아닙니다.
이 첫 번째 글에서 함께 확인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나는 디지털 앞에서 위축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다.
이해를 요구하고, 설명을 듣고, 선택하고, 거절하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다.”
이 기준을 마음 한편에 두신다면,
이후의 디지털 화면과 창구 앞에서,
스스로를 조금 덜 탓하고, 조금 더 당당히 질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권리 #시니어권리 #디지털포용 #시니어라이프 #고령사회 #권리로본나이드러가는나의삶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