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로 본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 ⑤
돌봄을 빚지지 않을 권리
돌봄 이야기만 나오면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미안함’입니다. “애들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국가 돈 쓰는 것 같아 죄송해서…” “요양원 가면 남에게 신세 지는 느낌이라…”
아픈 몸과 약해진 마음을 돌보는 일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책무입니다. 그럼에도 돌봄 앞에서 나이 든 사람은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인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이 글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나는 돌봄을 선택할 때, 어디까지 권리를 말할 수 있는가.”
1. 돌봄을 둘러싼 세 가지 오해
첫째, “돌봄은 가족의 의무”라는 말.
오래된 관습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모셔야지.”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돌봄을 가족에게만 맡기는 구조는 결국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모두를 지치게 만듭니다.
둘째, “국가·사회 지원은 정말 어려운 사람만 쓰는 것”이라는 생각.
스스로 이렇게 말하며 지원을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아직은 괜찮으니까, 진짜 힘든 분들이 쓰셔야지.” 하지만 복지 제도는 “남이 더 힘드니까 나는 빠져야지”라고 서로 양보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도움을 받으라고 만든 장치입니다.
셋째, “돌봄을 받는다는 건 패배”라는 인식.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봄은 자율성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보조 장치이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낮추는 도장이 아닙니다.
2.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돌봄 권리, 네 가지 기준
돌봄을 ‘호의’가 아니라 ‘권리’로 볼 때, 우리는 다음 네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돌봄의 내용을 알고 선택할 권리.
방문요양, 주야간 보호, 단기 입소, 장기요양시설, 호스피스 등 여러 제도가 있지만, 이름만 들으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서비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얼마나 자주, 어떤 시간이 가능한지,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이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둘째, 가족과의 관계에서 죄책감만으로 결정하지 않을 권리.
“아이들이 힘들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참을게.” 이 말 뒤에는 “내 몸은 나중에 보자”라는 자기 포기가 숨어 있습니다. 돌봄은 누군가의 인생을 빼앗는 대신, 서로의 부담을 적당히 나누기 위해 설계되어야 합니다.
셋째, 돌봄의 형태를 조정하고 바꿀 권리.
처음에 선택한 요양원, 요양병원, 방문돌봄이 항상 최선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돌봄 방식에서 바꾸고 싶은 점을 상담받고 싶습니다.”
“다른 기관과 서비스도 비교해서 결정해보고 싶습니다.”
돌봄은 한 번 선택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넷째, 돌봄 속에서도 ‘나의 방식’을 지킬 권리.
어떤 시간에 씻고, 언제 밥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돌봄 서비스는 이 사람의 삶의 패턴을 가능한 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3. 오늘, 스스로를 위해 해볼 수 있는 네 가지
돌봄을 ‘나중의 일’로만 밀어두지 않기 위해, 오늘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을 적어 봅니다.
1) “돌봄 일기”의 첫 줄 써 보기.
최근 6개월 사이에 몸과 생활에서 달라진 점을 적어 보십시오. 자꾸 넘어지려 하는지, 약이 늘었는지, 집안일이 버거워졌는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는지. 이 기록이 쌓이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2) 장기요양·돌봄 서비스 이름 한 가지씩 찾아 보기.
“노인장기요양보험”, “방문요양”, “주야간보호” 같은 기본 용어를 한 번씩 검색하거나, 주민센터·복지관에 물어봅니다. 모든 내용을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대략 알고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나중의 선택이 훨씬 쉬워집니다.
3) 가족과 ‘돌봄에 대한 약속’ 나누기.
가족에게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가 많이 아프거나 돌봄이 필요해지면,
너희 인생을 다 걸라고 하지 않겠다.
대신 제도가 있다면 같이 알아보고,
함께 결정하자.”
이 약속은 서로에게 미안함만 남기는 돌봄이 아니라, 함께 책임지는 돌봄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4) 돌봄 상담 창구 한 곳 알아두기.
지역의 노인복지관, 장기요양센터, 주민센터 등 ‘막히면 여기부터 간다’는 곳을 한 군데 정해 둡니다.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써 붙여 두어도 좋습니다.
4. 함께 요구해야 할 세 가지 방향
돌봄 권리는 개인과 가족의 힘만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첫째, 장기요양·돌봄 정보의 한눈에 보기.
복잡한 제도와 기관 정보를 한 곳에서, 한 번에, 쉽게 안내하는 창구가 필요합니다. 고령자가 스스로 전화해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가족 돌봄자의 부담을 줄이는 제도.
가족이 직장을 잠시 쉬어도 생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봄휴가, 돌봄수당, 대체 돌봄 서비스가 실제 생활에 닿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이 힘들까 봐”라는 이유로 자기 돌봄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 요양시설·병원의 질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시스템.
어디가 좋은 곳인지, 어디가 안전하고 존엄을 지키는 곳인지 ‘소문’이 아니라 공개된 정보와 평가를 보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이 편이 남기고 싶은 한 줄
이 글은 “모두 시설에 가라”는 권유도, “가족에게 기대지 말라”는 선언도 아닙니다. 단지 이 말을 함께 붙들고 싶습니다.
“나는 돌봄이 필요해졌다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에 빚만 지는 사람이 아니다.
정보를 알고, 선택하고, 조정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다.”
이 문장을 기억한다면, 돌봄에 대한 대화는 조금 덜 미안하고,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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