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가 함께 사는 집 – ‘멀티제너레이션 하우스’의 가능성
한국 사회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히 인구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사는 방식’을 다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 주거비에 시달리는 청년, 돌봄이 사라진 동네와 관계. 이런 현실 속에서 다시 주목받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세대가 함께 사는 집, 멀티제너레이션 하우스(Multi-Generation House)입니다.
멀티제너레이션 하우스란 노인과 청년 또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한 공간 안에서 각자의 독립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누리는 주거 구조를 말합니다. 한 지붕 아래 다른 세대가 함께 살지만,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돌봄과 배움의 교류를 중심에 둡니다. 이 개념은 단순한 건축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의 관계망을 재설계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1. 왜 지금, 세대공존형 주거인가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35%를 넘어섰고, 그중 절반 이상이 청년층과 노년층입니다. 두 세대 모두 고립과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청년은 높은 전세금과 월세에 허덕이고, 노인은 외로움과 돌봄의 공백을 겪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역할이 줄어든 자리를 누구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멀티제너레이션 하우스는 이 두 세대의 문제를 한 번에 완화하려는 실험입니다. 주거비를 나누고, 식사와 대화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에서 배움을 얻는 구조이지요. 노인은 오랜 경험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청년은 디지털 기술과 에너지를 더합니다. 서로의 결핍이 서로에게 자원이 되는 관계, 이것이 세대공존형 주거가 지향하는 그림입니다.
2. 해외에서 먼저 시작된 세대공존 실험
유럽은 이미 이런 세대공존형 주거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인터제너레이셔널 하우스(Intergenerational House)는 노인과 청년이 함께 살며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모델입니다. 청년은 노인을 위해 장을 보거나, 컴퓨터·스마트폰 사용을 돕고, 대신 저렴한 임대료 혜택을 받습니다. 노인은 청년에게 집밥과 삶의 조언을 나누며 ‘함께 사는’ 감각을 회복합니다.
네덜란드의 휴먼리타스 마을(Humanitas)은 대학생이 노인요양시설 안에 거주하며 일정 시간 돌봄과 교류 활동을 하는 방식입니다. 이 모델은 노인의 고립감을 줄이고, 청년에게는 생활비 부담을 낮추는 동시에, 세대 간 이해와 존중을 자연스럽게 키우는 효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주거를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관계 회복의 장으로 보는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3. 한국 사회에서의 가능성과 과제
한국에서도 세대통합형 주거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과 노인이 함께 사는 공공임대주택, 대학 인근의 세대공존형 기숙사, 도심 속 공용주택 등 다양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소규모 시범사업에 머무르고 있고, 제도와 인식의 벽도 여전히 높습니다.
노인은 “청년이 시끄럽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청년은 “노인과 함께 살면 불편하지 않을까”를 우려합니다. 결국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관계의 설계입니다. 단순히 방을 나누고 계약서를 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치와 만남의 계기가 함께 설계되어야 합니다.
4. 세대융합형 건축의 설계 원리
멀티제너레이션 하우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건축적 원칙이 중요합니다.
첫째, 분리 속의 공존입니다. 세대마다 생활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공유보다는 반독립형 구조가 이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각 세대에 작은 욕실과 미니 주방을 두되, 거실·정원·세탁실 같은 공간은 함께 쓰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생활과 휴식은 지키면서도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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