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돌봄의 의미 –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 돌보느니 일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만큼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감정과 체력을 요구하는 일인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 시절의 하루는 늘 전쟁 같았습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날들, 도와주시는 이모님들께 월급의 절반을 드리면서도 감사와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던 밤들. 아침마다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던 길에는 “오늘은 울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이 늘 따라붙었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면 잠든 아이 얼굴을 보며 ‘오늘도 함께 놀아주지 못했구나’ 하는 죄책감이 가슴을 눌렀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일과 아이 사이에서 늘 갈라져 있었고,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오른 채로 버티는 날이 많았습니다.
30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그래도 거리를 걷다 손주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할머니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달래는 시니어의 등을 보면 그 시절의 내 뒷모습이 겹쳐집니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아이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먼저 움직입니다.
어떤 날은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하고 말을 걸었고, 너무 힘들다고 하시는 분에게는 그냥 조용히 손을 덥석 잡아드렸습니다. 그 손의 온도는 오래전 내 손을 잡아주던 도와주시는 분의 손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돌봄은 함께 버티는 일이다
돌봄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돌봄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동시에 돌봄을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의 피로와 눈물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돌봄의 본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마음이 없었다면, 그 시절의 나는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돌봄은 결국, 함께 버티는 일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내게 돌봄의 의미를 깊게 새기게 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
이제 나는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을 다른 시선으로 봅니다. 그들은 단순히 아이를 맡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는 존재들입니다. 아이의 울음에 반응하고, 부모의 마음을 대신 품으며,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감정의 다리가 되어 있습니다.
돌봄은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유지되는 보이지 않는 기술입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배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법을 알고, 말보다 눈빛으로 마음을 읽을 줄 압니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그들과 함께 사람도 자랍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배웁니다. 인간의 삶은 결국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기술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
AI가 대화를 대신하고, 로봇이 아이를 안아주는 시대가 와도 사람의 손이 전하는 온기는 대체되지 않습니다. 그 온기는 기술보다 오래 남습니다. 그건 ‘살아 있는 시간’의 증거이자, 사람이 사람을 통해 배우는 마지막 기술입니다.
시니어의 손은 그 온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이 다시 다음 세대의 마음을 키웁니다. 돌봄은 그렇게 이어지고, 인간의 시간은 그렇게 순환됩니다.
돌봄은 여전히 나의 언어다
나는 아직 손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의 내 마음과 지금의 내가 이어집니다. 그 시절의 눈물은 후회가 아니라, 돌봄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해준 선물이었습니다.
돌봄은 누군가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 시절의 나는 울면서 버텼지만,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시간이 나를 키웠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음으로, 누군가의 돌봄을 조용히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돌봄은 여전히 나의 언어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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