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비 계산표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
간병비 계산표를 처음 만들어 놓으면 가족들은 잠시 안도합니다. 숫자가 정리돼 있고, 대략의 한 달 예산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계산표를 본 뒤부터 가족 간의 갈등이 더 커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미 계산해 놨는데 왜 또 싸우는 걸까”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계산표 자체가 아니라, 계산표가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숫자는 분명해 보이지만, 그 숫자가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전제가 다를 때, 같은 표를 보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1. ‘한 달’이라는 숫자가 확정인지 가정인지가 다릅니다
가장 흔한 충돌 지점은 기간에 대한 인식 차이입니다. 어떤 가족은 계산표를 보며 “이 정도면 한 달은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가족은 “이 상태가 한 달로 끝날 것 같지 않다”고 느낍니다. 계산표에는 ‘한 달’이라는 숫자만 있지만, 그 한 달이 확정된 기간인지, 임시 가정인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인식 차이가 곧바로 말다툼으로 이어집니다.
2. 총액은 있어도 ‘누가 무엇을 부담하는지’가 비어 있습니다
두 번째 충돌은 부담의 주체가 정리되지 않았을 때 생깁니다. 계산표에는 총액만 있을 뿐, 누가 어떤 항목을 책임질지는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병비는 누가, 병원 밖 비용은 누가, 예상치 못한 추가 비용은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숫자는 오히려 갈등의 근거가 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와 “그건 네가 안 내니까 하는 말”이 부딪히는 순간입니다.
3. 숫자가 ‘감정과 피로’를 눌러버리면 싸움이 시작됩니다
세 번째는 숫자가 감정을 눌러버릴 때입니다. 계산표가 생기면, 불안이나 피로 같은 감정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 같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오히려 숫자가 기준이 되면서, 누군가의 부담이나 지침은 과소평가되기 쉽습니다. “표에 없는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계산은 합리의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압박하는 수단이 됩니다.
4. 계산표는 ‘변화 가능성’을 담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계산표가 ‘변화 가능성’을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간병 상황은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상태가 바뀌고, 간병 방식이 달라지고, 퇴원 시점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산표는 현재 상태만을 기준으로 만들어집니다. 누군가는 이 변화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고, 누군가는 지금 숫자만 믿고 있습니다. 이 간극이 쌓이면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5.계산표 옆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준 합의’
그래서 계산표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계산표 옆에는 반드시 기준에 대한 합의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 이 계산은 어느 시점까지 유효한지
2) 상태가 바뀌면 어떤 조건에서 다시 계산할 것인지
3) 누가 어떤 결정을 책임질 것인지(퇴원, 간병 전환, 야간 강화 등)
4) 병원 밖 비용(이동·식비·소모품)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마무리
간병비 문제에서의 갈등은 돈이 부족해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기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숫자만 앞서 나갔을 때 발생합니다. 숫자는 차갑고 명확해 보이지만, 기준 없이 던져지면 가장 감정적인 싸움의 불씨가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라면, 지금 계산표에 적혀 있지 않은 질문이 무엇인지 한 번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질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면, 싸움은 숫자가 아니라 그 빈칸에서 시작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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