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권리로 본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 ②-버티는 집이 아니라, 요구할 수 있는 집

권리로 본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 ②
버티는 집이 아니라, 요구할 수 있는 집

나이 들어갈수록 집은 더 이상 “잠자는 공간”이 아닙니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고, 병원과 시장, 이웃과의 거리가 중요해질수록 집은 곧 안전이고, 건강이고, 존엄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나오는 말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 나이에 어디로 옮깁니까.”
“형편도 그런데 그냥 버텨야죠.”
“애들도 바쁜데 민폐 끼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위험한 계단, 미끄러운 욕실, 곰팡이 냄새, 외딴 골목을
“내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익숙한 체념에서 한 걸음 물러서 보려 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우리는 더 적게 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집에 대해 더 분명한 기준을 말할 자격이 있는 시민입니다.

1. 주거권, 나이가 들수록 낮아지지 않습니다

주거권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집을 누릴 권리”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최소한 이 세 가지는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 안전
넘어질 위험, 화재 위험, 붕괴와 누수, 곰팡이와 극심한 냉·난방 문제를
그냥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한 집은, 이미 기준을 밑돌고 있는 집입니다.

둘째, 접근성
화장실까지 가는 길, 현관 출입, 계단과 엘리베이터, 손잡이와 문턱.
나이 들어갈수록 “어떻게든 되겠지”가 아니라 “이 구조로 5년을 더 살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셋째, 연결성
병원, 약국, 마트, 버스와 지하철, 동네 주민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집이라면,
그곳에서의 고립은 개인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인 위험입니다.

나이를 이유로 이 기준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손해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이, 내 몸과 생활의 경고를 덮어버리는 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이 집, 계속 버텨도 되는지 묻는 구체적인 질문들

주거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당장 이사를 결심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솔직하게 보는 것부터가 출발입니다.

다음 질문들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 욕실 바닥은 미끄럽지 않은가, 잡을 손잡이는 있는가.
  • 침실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길에 턱, 문지방, 좁은 통로, 돌출된 가구는 없는가.
  • 밤에 불을 켰을 때 현관, 복도, 욕실 앞이 충분히 밝은가.
  • 엘리베이터가 없다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오늘도 겨우” 수준은 아닌가.
  • 누수, 곰팡이, 악취, 균열 같은 문제가 몇 해째 “그냥 참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응급 상황에서 바로 전화할 수 있는 기기와 번호(가족, 이웃, 119, 행정기관)가 눈에 보이는 곳에 정리되어 있는가.
  • 가까운 병원, 약국, 마트, 버스정류장까지의 길이 항상 위험하거나 지나치게 멀지는 않은가.

여러 항목에서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그 집은 단순한 ‘정든 공간’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사람에게 위험을 미루어두는 공간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입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바꿀 방법을 묻고, 다른 선택을 고민해 볼 권리가 나에게 있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버티는 집은 “논의할 수 있는 문제”가 됩니다.

3. 정보가 없어서 포기하지 않기: 세 가지 축

지원 제도와 대안을 ‘완벽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방향을 찾아봐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선택지가 생깁니다.

1) 집수리·안전 개선 지원
여러 지자체와 기관에서 고령 가구를 대상으로

  • 욕실 미끄럼 방지,
  • 안전 손잡이 설치,
  • 문턱 제거,
  • 경사로 설치,
  • 누수·단열 보수

같은 최소한의 집수리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동주민센터, 시·군·구청, 노인복지관에
“고령자를 위한 집수리·안전 지원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실제로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2) 공공임대·고령자 배려 주택
엘리베이터, 기초 안전 설비, 접근성 등을 갖춘 공공임대, 행복주택, 고령자 우선 주택이 있습니다.
“나는 안 될 것”이라고 미리 지우지 말고, 실제 자격과 대기 상황을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라는 단어가 두렵더라도,
“지금 집에서 5년 뒤의 나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정보 수집만이라도 시작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3) 주거·복지 통합 상담 창구
주거와 생활의 문제를 함께 듣는 창구가 각 지역에 조금씩 존재합니다.
주거복지센터,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복지관 상담실 등이 그 예입니다.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괜찮은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상담받고 싶습니다.”
이 요청 자체가 정당한 권리 행사입니다.

4. 그래서 지금,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권리를 안다고 해서 집이 바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소박한 행동 몇 가지가, “그냥 버티는 집”에서 한 걸음 나아가게 합니다.

  1. 내 집을 ‘기록’으로 점검해 보기
    종이 한 장을 꺼내 항목을 적어 보십시오.
    욕실 바닥과 손잡이, 문턱과 통로 폭, 조명 밝기, 계단·엘리베이터 유무,
    누수·곰팡이·균열 여부, 응급 연락 수단 위치, 병원·마트·교통까지 거리.
    막연한 불편을 글로 옮기는 순간, 어디를 손봐야 하는지, 어느 지점이 위험한지 선명해집니다.
  2. 주민센터·복지관에 한 번은 직접 묻기
    “고령 가구를 위한 집수리나 주거 지원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상태의 집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지 상담받을 곳이 있을까요?”
    이 두 문장만 실제로 꺼내 보셔도, 그냥 넘어갔던 가능성이 열립니다.
  3. 5년 뒤의 나를 기준으로 집을 다시 보기
    지금의 계단, 욕실, 골목, 교통 환경을 떠올리며 묻습니다.
    “5년 뒤에도 이 집에서 스스로 오르내리고 다닐 수 있을까?”
    이미 지금도 벅차다면, 이사를 “무모한 일”이 아니라 “내 안전과 존엄을 위한 계획”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4. 가족·지인과 주거 원칙을 미리 나누기
    미리 이렇게 약속해 둘 수 있습니다.
    위험한 낙상이나 화재 위험이 반복되면, 집수리나 이사를 진지하게 검토한다.
    계단이 감당되지 않으면, “그냥 참는다”가 아니라 다른 선택을 찾는다.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면, 함께 상담 창구를 찾아가 본다.
  5. 말문을 여는 문장을 마음에 준비해 두기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언제 써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현재 집이 저에게 조금 위험해 보여, 이용할 수 있는 지원과 대안을 알고 싶습니다.”
    “고령자를 위한 주거복지 제도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이 상태로 지내기 걱정되어, 함께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집 문제는 개인의 참을성이 아니라 공적으로 함께 다뤄야 할 과제가 됩니다.

5. 우리 모두가 함께 요구해야 할 것들

개인의 결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역도 분명히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향을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고령자를 ‘감안한’ 최소 주거 기준
낡은 건물, 고시원, 반지하, 옥탑 등에서 안전과 위생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환경을 방치한 채
“어르신들이 선택한 것”으로 돌리지 않도록, 점검과 개선, 대체 주거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둘째, 주거·복지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창구의 단순화
여러 제도가 있어도, 안내가 흩어져 있고 어려우면 결국 “모르는 사람이 손해 보는 구조”가 됩니다.
고령자가 한 번에 상담받을 수 있는 창구를 분명히 두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셋째, 고립을 키우는 집 구조와 지역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
교통, 의료, 생활 인프라에서 완전히 떨어진 주거 환경을
개인의 선택이나 “싼 집을 고른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지자체와 국가가 함께 해결할 과제로 다루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이 요구들은 특별한 호의가 아니라,
평생 이 사회를 떠받쳐 온 세대에 대한 정당한 응답입니다.

6. 이 편이 남기고 싶은 한 줄

이 글은 “지금 당장 이사하라”는 호통이 아니고,
“형편 생각 안 하냐”는 비현실적인 권유도 아닙니다.

그저 이 한 줄을 함께 확인하고자 합니다.

“나는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위험한 집을 감수해야 할 사람이 아니다.
안전하고, 오갈 수 있고, 연결된 집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다.”

그 기준을 마음 한편에 세워 두신다면,
지금의 집을 바라보는 눈,
행정 창구에서 꺼내는 첫 문장,
가족과 나누는 대화가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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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정말 로. 자세하게 ㅡ
    일목요연하게 똑소리나게 쓰셧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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